평일 낮이었지만 병원 내 대기실은 사람으로 들끓고 있었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리도 많은지. 무심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웨이는 걸음을 옮겼다. 수납 대기실 앞으로, 원내 약국 앞으로, 그리고 지금은 중앙 안내소 앞을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이었다. 웨이의 이런 움직임은 병원 관계자들에게는 꽤 낯선 것이었지만 적어도 웨이 본인에게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앨리스가 어디 있을 지 모르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술래잡기 같은 것이었고, 가끔 헛걸음을 하는 날도 있었지만 운이 좋다면 웨이는 제법 높은 확률로, 지금처럼 복도 저 끝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웨이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앨리스는 반투명한 몸을 돌려 지하주차장 쪽 계단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놀아 달라는거지? 웨이는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앨리스의 뒤를 쫓았다. 한 사람 분의 발소리가 텅 텅 주차장을 내려갔다. 중간 중간 웨이를 돌아보던 앨리스는 잡힐 것처럼 가까워지면 빠르게 내달리기를 반복해 웨이와의 거리를 벌렸다. 웨이도 앨리스가 너무 빨리 잡히지 않도록 적당히 느린 속도로 달리기를 반복했다. 앨리스가 이윽고 차들이 나란히 들어선 주차장에 내려섰다. 차와 차 사이로 숨은 그 뒷모습을 쫓아서,
"잡았다!"
하고 웨이가 외칠 때였다.
"...안녕하세요."
앨리스는 간 곳 없고, 웨이의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그 때처럼, 어색한 듯 고개만 삐딱하게 숙여 인사를 건네는 그 무표정한 얼굴이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습게도,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이름은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만에 웨이는 그 때 같이 있었던 여자애가 '보나야!' 하면서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김보나입니다, 그, 킹덤 병원의..."
웨이의 침묵이 어색했던 것처럼 보나는 뒷목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알고 있었는데. 웨이는 조금 탐탁잖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앨리스는?"
"아, 그게...저도 앨리스 목소리에 이쪽으로 왔는데..."
없네요. 주변을 한참 둘러보다가 보나는 그렇게 말했다. 웨이는 물끄러미, 앨리스를 찾아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보나를 쳐다보았다. 그 일 이후로 이 년 정도 지났지만 기억 속 얼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어쩐지 시간을 훅 거슬러 다시 그 때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나를 여기로 데려왔니? 마음 속 앨리스에게 말을 걸듯 웨이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네."
"네, 뭐...그럭저럭. 오랜만이예요."
키가 조금 컸나. 눈 높이가 비슷해졌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굳이 낯선 점을 찾는다면 목에 걸린 헤드폰 정도일까. 무뚝뚝한 척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것도 예전과 똑같았다. 문득 보나의 눈이 웨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눈을 쏘려고 했지. 까맣고 커다래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비출 것 같은 그 눈을 향해 웨이는 총을 겨눈 적이 있었다. 그 때를 회상한 탓인지 목이 타, 웨이는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갑이 잡히지 않았다. 들어오기 전에 다 피웠지. 공허한 손에 담배 대신 차 키를 쥐며 웨이는 조금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한 잔 할래?"
"저 십 대인데요."
한 잔 하자는 게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말인 줄 알았지, 설마 너무 자연스럽게 술을 권할 줄은 몰랐던지라 보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웨이는 맞은 편에 앉아 보나를 쳐다보다가 온 더 락 잔을 벌컥 비웠다. 그리고 술이 차 있는 보나의 잔과 위치를 바꿨다. 됐지? 웨이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보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갔어요, 병원?"
거푸 잔을 비우던 웨이에게 보나가 물었다. 몇 잔 째지. 컵 바닥에 뒹굴고 있는 얼음에서는 이제 물 맛보다 술 맛이 더 강하게 올라왔다. 웨이는 겉에 물기가 맺힌 컵을 손 끝으로 쓸었다. 보나는 더 묻지 않았다. 원래도 시끄러운 편은 아니었지. 귀찮은 성격이기는 했지만. 새삼스러운 감상에 웨이는 코 끝으로 픽 웃었다.
"그 애."
보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웨이는 새 담배갑을 뜯었다. 가스가 동난 지포 라이터는 몇 번 찰칵거린 후에 불이 붙었다. 향연처럼 담배 연기가 탔다.
"언제까지 거기 있어야할까."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쉬며 웨이는 의자에 깊게 등을 묻었다. 폐부로 깊게 스며오는 담배 연기에, 혹은 의미 없는 것처럼 중얼거린 자신의 말에 가슴 언저리가 타는 듯 쓰라렸다. 대답 대신 보나는 웨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을 돌렸다.
"왜 우리는,"
아니, 왜 나는.
마른 입술을 웨이는 그런 말로 적셨다.
"그 때 그 아이를 완전히 구해주지 못했던걸까."
여전히 보나로부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싫지는 않았다. 녹은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무너지는 소리가 문을 열지 않은 가게에 쓸쓸히 울렸다. 멍청했다. 떠올렸어야 했다. 아이는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불렀다. 끝까지, 아이가 부탁한 이상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신경 썼어야 하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해피 엔딩이니까.
그러나 보나는 웨이를 탓하지 않았다. 막연히 위험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때, 보나는 메어리의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던 웨이의 표정을 보았다. 한 장 한 장, 색 바랜 일기장을 넘기며 떨리던 그 손도.
보나는 웨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몇 번을 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보나는 웨이가 메어리를 쏠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웨이를 탓하지 않았다.
"살아있어?"
"아, 네."
"너무 조용해서 내가 쏴버린 줄 알았네."
어색한 침묵을 농담으로 덮으며 웨이는 킬킬 웃었다. 직접 총구를 겨누어졌던 입장에서는 농담으로 듣기 힘든 말일 수도 있었지만 보나는 개의치 않았다. 되려 그 이야기가 반가웠다는 듯 보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 모든 게 꿈은 아니었겠죠."
누가 들어도 의문으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보나가 입을 열었다. 웨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보나는 꼼지락 꼼지락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들어 웨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가게 문에 붙여놓은 건 뭐예요?"
보나의 말에 웨이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냥, 취미...취미라고 부르기는 조금 이상하군. 흥미? 왜, 관심 있어?"
나른한 어조의 말에 보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대답이 목에 걸린 것처럼 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미신을 끊어버립니까? 언제인가부터 보나는 신앙 고백의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성경에 적혀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그 어느 교리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 남자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불렀다.
보나는 짧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에 꾹 파고 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똑바로 웨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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