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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PG 리플레이/리플레이 소설

CoC 시나리오 '이상한 나라의 쇼거스'-프롤로그 : 팬더 / 강다윤 편

시나리오 '이상한 나라의 쇼거스'

키퍼링 : 노멘님

시나리오 번역 : 연어님

플레이어 : 물병님 (팬더), 세이즈님 (강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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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치고는 큰 키, 십 대 치고는 큰 키. 어느 쪽으로 불러도 그 큰 키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들과는 상관 없이 그녀는 배구부 활동을 마치고 폴짝폴짝 가벼운 걸음으로 하교 중이었다. 큰 키에 비해 묘하게 굼뜬 동작 때문에, 커다랗고 느린 게 꼭 팬더 같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마음에 들어서 하굣길은 여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바람도 시원하고 콧노래라고 부르고 싶은 기분으로 걷던 팬더는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기묘한 것이 눈에 띄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길 위에 새하얀 토끼가 두 발로 서 있었다. 꼭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잘못 본 것인가 싶어 팬더는 눈을 비볐지만 신호가 바뀔 때까지 그것은 거기 서 있었다.


"...새로 나온 포켓몬인가?"


요즘 유행이랬지. 게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 중이라, 팬더도 토끼를 보며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잡히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팬더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길이 찍혀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팬더는 고개를 들었다. 토끼는 분명 제자리에 서 있었다. 


"뭐야...카메라 설정이 잘못 됐나?"


좀 더 가까이 가면 제대로 찍히려나 싶어, 팬더는 겅중겅중 폭이 넓은 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그제야 팬더를 눈치 챈 것처럼 토끼는 팬더 쪽을 돌아보고 거리를 유지하듯 몇 걸음 물러섰다.


'이거 사진 찍으면 페북 스타 각인데.'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한 걸음 더 팬더가 다가섰을 때, 토끼는 두 발로 달려 골목길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야! 잠깐 기다려 봐!"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에 팬더는 공을 받을 때처럼 빠르게 달려 토끼를 따라 골목길을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발 밑이 쑥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놀라서 아래를 쳐다 본 팬더의 눈에 비친 것은 어느샌가 길 위에 뻥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이었다.


배구부 자칭 에이스가 이런데에서 빠져 죽을 순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팬더가 뛰어 올라 구멍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발 밑에 닿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속절없이 팬더는 소리를 지르며 아찔할만큼 깊게 보이는 구멍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팬더가 구멍 아래로 사라지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던 그 때에, 강다윤은 무료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 나이쯤 되면 학교 도서관에 앉아있는 건 그 정도의 괴짜가 아니고서야 드문 일일 것이다. 클래스 메이트들이 고지식하고 과연 아시안에게 어울리는 취미라며 놀려대도 다윤은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그의 또래들은 거진 다 인턴 자리를 잡았거나 아르바이트 중일테니, 다윤은 도서관을 전세 낸 기분으로 쾌적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다 읽은 책을 덮고 다시 자리에 돌려두러 가던 중, 옆 책장에서 톡 톡 하고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꼭 인형이나 베개처럼 폭신한 것이 바닥에 닿는 것 같은, 작지만 분명 사람의 발소리와는 다른 것이었다.


다윤이 옆 책장을 보자, 그곳에는 하얀 토끼 한 마리가 낑낑거리며 힘겹게 책장을 오르고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나풀거리는 검은색 옷을 입은 채로.


"....헛것이 다 보이는군."


이상한 경험이라면 그 병원에서 했던 걸로 충분하다고 진저리를 치며, 다윤은 토끼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놀란 듯 토끼는 책장에서 내려서 다윤에게서 다급히 멀어졌다. 다윤이 손을 뻗자, 토끼는 두 발로 뒷걸음질 쳐 다윤에게서 멀어졌다.


"귀엽...아니. 왜 여기 있는거야?"


다윤이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리자 토끼는 다윤을 쳐다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더니 다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아들어?"


그럴 리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윤은 손을 뻗어 토끼가 올라가려고 하던 책장 쪽을 가리켰다. 말이 통할 리 없는데도, 토끼는 다윤이 가리킨 책장 쪽을 쳐다보다가 다윤이 가리킨 곳을 향해 하얀 앞발을 뻗었다. 다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토끼의 키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이에 꽂혀있는 동화책이었다.


"하하, 미쳤군..."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다윤은 동화책을 뽑아 들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울리네. 다윤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허리를 굽혀 토끼에게 동화책을 건넸다. 정확히는 건네주려고 했다. 토끼는 갑자기 휙 뒤를 돌아 책장 저편으로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기 전에 멈추어 서 다윤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토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따라오라고?"


토끼는 대답하듯 자리에서 두 어번 깡총깡총 뛰더니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빼꼼 긴 귀와 얼굴만 내밀어 다윤 쪽을 쳐다보았다. 다윤은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병원 다시 가 봐야지..."


도서관 나가면 병원에 연락해야겠다. 제가 헛것이 보이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며 다윤은 토끼를 따라갔다. 터벅터벅, 타박타박.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발소리가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이 책장 저 책장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누비던 토끼는 또 다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리고 다윤이 똑같이 코너를 돌았을 때, 다윤은 현기증을 느꼈다.


발 밑이 쑥 꺼지는 느낌과 함께 도서관 천장이 멀어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시야에 뺴꼼, 토끼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잠시 후 강다윤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험악한 욕설을 쏟아내며 동화책을 든 손을 토끼를 향해 붕붕 휘둘렀지만 그 무엇도 토끼에게는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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