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후기는 전지적 아나키스트 시점으로 쓰여졌습니다.
때는 평행프로도 끝난 8월 말.
이런 트윗이 타임라인에 올라왔다.
뭐지? 내가 언제 이런걸 팔로우했지? 나 WOD 안 하는데? 하고 봤는데 이전에 평행세계 프로젝트 관련으로 팔로우 한 계정이었다.
그러고보니 여타님이 뭔가 행사 준비하고 계시다고 했었는데 그건가? LARP는 뭐지? 하고 계정을 보니...
참가 안 한다는 선택지는 그 때부터 이미 없었다.
혼자서 조용히 다녀올까 했는데 행사가 너무너무 재밌어 보이고 한국에서 이런 걸 언제 또 해보겠냐 싶어서 설레는 마음에 이 어썸한 경험을 같이 나누고 싶어서 생버섯님을 찔러서 같이 가자고 하고...(받아주신 생님 감사합니다...)
PC 소개가 떴을 때부터 이미 마음을 아나키스트에 독보적 1픽으로 뽑아놓고 장바구니에 입고 갈 옷도 골라놓고 조마조마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던 중
그 날 바로 장바구니에 있던 옷 결제.
아아ㅡ, 모르는가? 이것이 한국의 아나키스트의 룩이라는 거다ㅡ.
그렇게 신나서 준비를 하고, 구체적인 설정이나 비밀을 받은 게 없지만 머릿속에 한O타이어 직원복 입고 있지만 사실 폐차장을 운영 중인, 아무리 잘나신 귀족 뱀파이어도 차에 실어서 폐차장에서 꽈직 해버리면 아주 볼만해지거든. 하고 위험함을 드릉드릉 뽐내는 뉴비 아나키스트 뱀파이어 박상수 씨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출발.
(저는 온건한 사람입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영화에서 본 장면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30분 일찍 출발하면 1시간 일찍 도착하고 5분 늦게 출발하면 2시간 늦는 지방민의 법칙을 충실히 지켜 1시간 30분 전에 도착해서 역에서 떨던 중 스탭분들이 오셔서 합류. 그 날 따라 왜 그렇게 추웠는지.
아는 사람들과 눈인사도 하고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 빼고 다 지인인 것 같은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역시 티알인들 아싸라는 건 죄다 뻥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산장 도착.
도착해서 NPC로 착장하고 있는 스탭분들을 보자마자,
이 정도로 본격적으로 꾸민다고는 안 했잖아!!!!!!!
라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스즈끼복을 넣은 가방을 매고 들어갔다...물론 다들 본격적으로 꾸밀 생각 만만이었으며 기성복으로 퉁치려던 나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이었음을 나는 약 한 시간 뒤에 깨닫게 된다.
정말 수줍음의 정적과 어색함 속에서 식사가 끝나고 NPC 소개와 초대장 배부 시간을 거쳐 본격적으로 환복을 시작하고,
방금 전까지 수줍어하던 사람들은 거기 없었다. 약 30 명 정도의 뱀파이어와 인간과 구울이 있었을 뿐. 할로윈 파티라는 걸 처음 해봤기 때문에 정말 너무너무 신난 기분으로 이 때부터 초 하이텐션이었다. (특히 버밀리온 분들 드레스 다 하나같이 너무 이쁘고 진짜 최고였고 아 좀 더 추근대고 싶었는데 죽어 박상수)
기본 규칙에 대한 것을 듣고 마침내 파티가 시작되었고, 탁 모두의 RP 스위치가 올라가는 순간 그곳은 정말로 뱀파이어들의 욕망과 야욕이 드글거리는 사교 파티장으로 변했다.
다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TRPG나 오프라인 행사가 처음인 분들도 계셔서, 기왕 아나키스트인 거 열심히 만나는 사람마다 족족 시비를 걸고 다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걸려오는 시비에 대답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좀 더 움직이기 쉬워지지 싶어서...
박상수의 외모나 신경질적으로 빈정대는 느낌의 모티브는 회색도시2 김성식.
박상수 씨는 뱀파이어가 된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뱀파이어가 된 이유도 재수 없게 뱀파이어들 사이의 다툼에 엉겁결에 껴버렸다가 새우등 터져서 그런 것인데 거기에 뱀파이어 사회의 부패와 경직된 구조를 보는 순간 안 그래도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하는 바람에 이 파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 아예 작정하고 움직인 캐릭터. 그래서 고귀하신 귀족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 일부러 기름 때 꼬질한 작업복을 입고 나타나서 빈정대고 시비 털고...라는 느낌으로 RP를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감 못 잡고 적응도 못하고 있다가 NPC 김재영이 NPC 최모기에게 와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는 순간 '그렇구나, 이건 내 눈 앞에서만 사건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때부터 여기저기 정보를 모으러 움직이기 시작함.
그러나 충실하게 정보만 모으는 게 아나키스트의 할 일은 아니지.
정보를 쥐고, 그 정보를 기반으로 다른 PC들과 거래해서 새로운 정보를 얻고. 얻은 정보는 족족이 아나키스트 연맹의 동지들과 공유하면서, 거래 대상으로 내놓은 정보에는 일부러 거짓말을 섞어서 뿌렸다. "뭐라고? 그런 말을 누가 했어?" 라는 반응에는 "거기서부터는 유료 서비스이십니다, 손님." 하면서 대가를 달라고 했는데 사실 대가를 받았으면 곤란했을 게....그야 가짜 정보니까요....!! 아무도 그런 말은 안 했죠!!
그렇게 해서 정보전을 하다보니 갑자기 덜컥....NPC 김재영이 죽어버렸다.....
나는...나의 비밀은....김재영이 내 재산과 영역을 건드린 뱀파이어라고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김재영에게 복수하고 괴롭히는 거였는데....죽어버렸다....
이렇게 전반전이 끝나고 나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후반부의 분위기는 남작의 주도 하에 사건을 해결 (= 범인을 찾거나 만드는)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뿌린 가짜 정보도 아무래도 쓸모 없어지고 뭔가 단서를 더 찾기에는 우리 클랜은 싹 다 육체계 능력만 있었기 때문에...
그냥 모든걸 내려놓고 흘러가기로 함. 후반부의 제가 왠지 맥빠져 보이지 않던가요? 사실입니다.
여튼 그런 와중에 남작이라는 확고한 우두머리가 등장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연맹의 '파티를 망친다' 라는 다소 모호했던 목표가 분명해지고, 최모기를 필두로 하여 혁명을 꾀하지만 실패.
심지어 이 때는 스릴시커와의 물리 갈등에서도 다른 세력들이 뱀파이어 동족인 우리가 아닌 인간인 스릴시커 편을 들어주는 시점에서 아나키스트 연맹의 고립이 확실한 상황.
혁명이란 이다지도 어렵고 고독한 것인가...
그래서 후반부 종료를 몇 장면 앞둔 상황에서 아웃 오브 플레이로 어떻게 아나키스트 연맹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것인지 플레이어들과 상의하고, '개죽음이 되더라도 남작과 싸우자.' 라는 결론으로 합의.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남작에게 패해 '우리가 흘린 피가 뱀파이어의 새로운 사회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하고 외치고.....쓰러지려는데...
쓰러지려던 내 눈에 보인 것은 같이 싸우는 대신 마담 레베카 옆에 같이 서서 쓰러진 동지들을 쳐다보고 있는 뱀파이어 닐, 방금 전까지의 동지였다..........
닐은....버밀리온 측에도 정보를 흘리고 있는 이중 첩자였고....
마담 레베카가 '그런 미치광이 말에 홀려서 안타깝게 됐네. 그냥 이쪽에 붙는 게 어때?' 라고 흘러가는 말처럼 나에게도 말했었는데...그것이...복선이었던 것....
"혁명도 일단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거지." 라는 닐의 말을 끝으로 멀어져가는 의식....
그렇게 아나키스트 연맹의 뱀파이어들은 언젠가 찾아올 지도 모르는 혁명의 날을 위한 토대가 되어 스러졌다....
...이렇게 쓰고나니 스토리의 메인 플로우랑 너무 거리가 멀어져 있어서 조금 민망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LARP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어쨌든 플레이어가 움직이면서 얻는 것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사실 메인 플로우에서 모르는 정보가 너무 많았음. (피가방이 뭐? 도굴품이 뭐?) 게다가 단서를 얻고 조사하고 싶어도 우리 클랜은 전부 물리계 스킬 밖에 없었기 때문에....(또르르) 그렇지만 한정 된 정보와 시간 속에서 하나의 완결 된 좋은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최고 만족! 함께 해 준 손인형님, 닐님, 에스젯님께 모두 감사를 드리며....
아, 정보 공유하고 나올 때마다 자유 아나크를 위하여!! 하고 소리치면서 나왔는데 진짜 너무너무 피가 끓고 좋았음.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뒤풀이를 하는데도 뽕이 안 빠질만큼 어마어마하게 좋았고 한 일주일동안은 거기서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곱씹으면서 지낼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좋네...어쩜들 그렇게 다들 RP도 잘하고 복장도 완벽하고....역시 2회가 빨리 열려야하지 않을까...여타님 뱀파이어들 크리스마스 파티는 안하나요???
정말 너무너무 좋은 행사였고 차회가 열린다면 조금 더 이런 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1. 스토리의 메인 플로우를 보여주는 게시판? 이나 정리본.
화이트 보드 같은 데다가 핵심이 되는 키워드나 사건을 진행에 따라서 같이 정리하거나, 아니면 중간에 사건 요약 정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사람이 직접 움직이면서 진행을 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제한이 있고, 캐릭터의 사명에 따라 메인 플로우와 관련 없이 진행을 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끝내 사건들이 어떤 거대한 사건 한 지점에 모여서 정리 되는 시나리오라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 지 정리해서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2. X카드 (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그 무엇)
물론 제스처를 통해 쉽게 플레이어 간 대화를 할 수 있고 합의를 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만큼 누군가의 트리거가 될 수 있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 평범하게 테이블에서야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됐을 때 진행을 멈추고 조율하는 게 가능하지만. 대인원인 상황에서는 내가 멈추려고 해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상황이 진행되어 모두가 모여있는 곳에서 터질 수도 있는거고..(실제로 우리 팀 내부에서는 한번 이야기 조율 중 X카드가 나오기도 했고)
협의로 진행되는 이야기지만 개인이 모두와 협의를 할 수 있는건 아니기 때문에 사전에 트리거 워닝이라든가 모집 단계에서 이 PC는 이런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or 저는 이런 트리거가 있습니다 라고 조율하는 단계가 있으면 앞으로 보다 안심하고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그런 점이 없더라도 정말 완벽하게 즐거운 시간이었고, 역시 다음날 숙취로 죽더라도 뒤풀이에서 신나게 떠들면서 놀걸....자제력 판정하지 말걸....하는 짙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좋은 시간 만들어주신 스탭분들, 함께 해주신 플레이어들 정말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난폭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무례한 발언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언제라도 그 때 불쾌했다 하는 지점이 있으셨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ㅠㅠㅠ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족족 시비를 털었더니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사과하기가 어려워서....꼭입니다...
박상수는 이렇게 죽었지만 언젠가 한국 뱀파이어 사회에도 변화가 찾아올 것을 믿습니다. 우리 신념을 함께 나눴던 동지도 아직 살아있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변할거라고 믿어봐도 되겠지!
자유 아나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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